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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긴글 짧은글 ♣/시가 있는 풍경

바람의 지문

by 별스민 2022. 11. 27.

바람의 지문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어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이은규 시집 『다정한 호칭』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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