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風에 기대어
이기철
별리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간 이파리 하나쯤 떼어가는 아픔이야
별리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 있으랴
마음보다 치장이 아름다운 서풍이여
너의 안식의 축도(祝禱) 앞에 몇 사람은 저녁 수저를 들고
몇 사람은 길 위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기 쉬운 약속을 한다
저녁으로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언약들이 반짝인다
우리는 이제 이른 저녁을 먹고
들 가운데 서서 오늘 보다 아름다울 내일을 말할 차례다
양치기 소년들의 고단한 발을 쉬게 하고
펄럭이는 내일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만남보다 진한 이별을 말할 차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문 밖에서 바람은 흰 피륙을 짜고 있다
사람의 하루가 고단하여 침실에 몸을 누이는 저녁에도
과일나무의 과일은 저 혼자 익는다
서쪽으로 가면 웬일인지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들판 끝을 헤매다 서풍의 옷자락에 싸여 돌아온다
선사(先史)로 돌아가고 싶은 장엄한 몸짓인 서풍이여
너의 치마 끝에 내리는 놀의 물감으로
오늘 우리는 주홍빛 이별을 기록해야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기록하리라
어둠 뒤에서 마지막 한 겹 속옷마저 벗고
알몸으로 초록 위를 부는 서풍이여
이맘때쯤 바람과 능금나무의 화간(和姦)에도
우리는 박수치리
그리고 세상의 푸름들이 시들기 전에
우리는 필생의 편지를
한 사람의 이름 앞으로 보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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