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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긴글 짧은글 ♣/시가 있는 풍경

눈 길

by 별스민 2014. 3. 2.

눈길
   박영근

 

이십리가 넘는 눈길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누우신 지 오래되어
마당에선 늙은 개오동나무가 혼자

우두커니 눈을 맞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 들어가는 산골 버스가 끊겨
아버지는 새내끼줄로 감발을 치고
눈 쌓이는 길을 내처 걸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넓은 등에 업혀
지나가는 전봇대를 세다가
깜뿍깜뿍 잠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면 선득선득 이마가 차고,
눈에 덮여 조개미며, 큰다리며, 삼간리며
내가 아직 이름을 모르던 마을에서는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까웁던 산이 눈발 속에서 먼 곳으로 가 꺼뭇하게 떠오르고,
아버지는 슬픈 소리가락을 불러내어
바람 속에 눈꽃을 매달아 두었습니다.
배고픈 새 몇 마리가 눈밭에서 울다가
날 저무는 어둑한 눈발 속으로 날아갔습니다.

 

나는 아버지 등에 고개를 묻고
어머니가 방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었을 놋쇠주발의 밥과
된장기가 얼큰한 시래깃국을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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