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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긴글 짧은글 ♣/시가 있는 풍경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by 별스민 2022. 4. 30.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 기철

 

 벚꽃 그늘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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