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습니다
도종환
저녁 햇살 등에 지고
반짝이는 억새풀은
가을 들판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차가워지는 바람에 꽃 손을 비비며
옹기종기 모여 떠는 들국화나 구절초는
고갯길 언덕 아래에 있을 때
더욱 청초합니다.
골목길의 가로등
갈림길의 이정표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보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젊은 날의 어둡고 긴 방황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한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기나긴 그리움의 나날도
있어야 할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겁니다.
머물 수 없는 마음,
끝없이 다시 시작하고픈 갈증도
내가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고
산그늘이 들판을 걸어 내려오는 저녁이면
또다시 막막해져 오는 우리들의 가슴은
아직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일지 모릅니다.
잎이 지는 저녁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서 더욱 빛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 시와 긴글 짧은글 ♣ > 시가 있는 풍경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들수만 있다면 (0) | 2021.12.03 |
---|---|
오히려 비내리는 밤이면 (0) | 2021.12.01 |
가을 엽서 (0) | 2021.11.27 |
이별노래 (0) | 2021.11.25 |
겨울초입 (0) | 2021.11.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