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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긴글 짧은글 ♣/시가 있는 풍경 924

그 겨울의 시 그 겨울의 시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2024. 1. 14.
1월의 시 1월의 시 이해인 첫 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한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 놓고 가 부디 고운 저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2024. 1. 12.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 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2024. 1. 12.
눈 내리는 날 월드컵 공원에서 눈을 기다리며 권오범 늙어갈수록 철들 기미조차 없는 나의 주책 첫눈은 함박눈이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마른하늘 우러러 히죽거리는 것이 언제부턴가 나도 몰래 내 안에 소녀 마음이 자라고 있었나보다 눈 감고 잠 끌어당겨 구절양장 인생길 치쓸다 보니 강아지와 함께 찍었던 발자국이 고향 남새밭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어 미소 흘리며 엎치락 뒤치락하는 이불 속 서울은 낭이라더니 추억마저 되작이는 게 싫은걸까 한 사날 독하게 최대한 밤을 키워놓은 이정표 동지가 달력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다 백설기 같은 숫눈길로 달려오는 햇귀로 하루를 열고 싶은 이 마음 아랑곳 없이 밤새 기척도 없이 내린 비에 세상이 온통 호졸근한 아침 2024. 1. 1.
눈 꽃 눈꽃 박인걸 나무들 가지마다 몇번이나 눈꽃이 피고져도 봄은 올 기색이 없다 차갑게 피는 눈꽃은 세상을 물들일 뿐 생명을 움직이지 못 하고 눈꽃에 마음이 들뜬 자들은 잠시 후 실망을 내뱉고 향기없은 차가운 가루에 낭만은 녹아내릴 것이다 눈꽃은 꽃이 아니라 누군가 지어준 이름일 뿐 죽은 별들을 화장한 가루일지도 모른다 눈 내린 가슴마다 무덤이되고 꽃이 죽은 길 거리는 차들도 무서워 설설긴다 그래서 눈꽃이 내리는 날이면 세상은 숨을 죽이고 폭설 아니기를 기도하고 있다 2023. 12. 24.
첫눈 오는 날의 시 첫눈 오는 날의 시 정연복 맘속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첫눈 지금 풍성히 내리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 허공 가득 눈송이 송이마다 가벼운 춤사위. 오늘은 나도 춤추듯 살아야겠다 삶의 염려와 욕심 따위 하얗게 잊고. 세상모르는 어린아이 처럼 백설의 순수한 마음 하나만 품고서. 눈 기다림 서봉석 눈 내리는 것 보자고 추워도 겨울을 기다린다 눈이 내리면 한 뼘씩 그늘 덜어내며 쌓이는 눈 속 뼛속까지 하얀 눈사람으로 우리도 둥글게 모여서 비록, 천당은 못갈 목숨이래도 이 세상 살고 있는 지금은 즐거워라 촛불 한 자루에도 은근해지는 사람들의 저녁 해 안뜬 날도 걱정 없이 하늘의 초청장처럼 무량하게도 내리는 눈 가로등 불빛에 멋들어 지면 정 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크리스마스 카드가 보고 싶어서 추워도 겨.. 2023. 12. 14.
가을 전송 가을전송 공석진 가을을 전송합니다 화려함 남겨두고 빛 바랜 옛 추억을 나들 길로 보냅니다 고독을 만끽하세요 위태로운 정이 매달린 험한 비탈 위 정처 없는 낙엽으로 이별을 강요하신다면 수신을 거절하렵니다 발신자도 없는 이름뿐인 천사 언제든 떠나려는 배낭 짊어진 당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누워 아릿하게 남아있는 바람꽃 향기를 추억하렵니다 2023. 12. 12.
가을은 줍는 달 가을은 줍는 달 박노해 가을은 그저 줍는 달 산길에 떨어진 알밤을 줍고 도토리를 줍고 대추 알을 줍고 ​ 가을은 햇살을 줍는달 물든 잎새를 줍고 가을 편지를 줍고 가슴에 익어 떨어지는 시를 줍고 ​ 그저 다 익혀 내려주시는 가을 대지에 겸허히 엎드려 아낌없는 나무를 올려다 본다 ​ 그 빈 가지 끝 언제 성난 비바람이 있었냐는듯 높고 푸른 하늘은 말이 없는데 ​ 그래 괴로웠던 날들도 다 지나가리라고 다시 일어서 길을 걷는 가을 가을은 그저 마음 줍는 달 Ernesto Cortazar /Dreaming 2023. 11. 30.
가난한 가을 날에 가난한 가을 날에 박노해 늦은 가을비 내리는 나무 사이를 걸으며 떨어지는 잎들이 그랬다 올 가을은 가난 했다고 단풍조차 다 물들지 못해 미안 하다고 말라 초라한 잎이라도 비 눈물에 고이 펴서 나 바람에 진다고 가물었던 지난 여름 곱게 빛나지도 못한 부실한 내 가을 생애 후회 하는가 후회는 없다 원망도 없다 회한이 있을 뿐 잘 해주고 싶었으나 어려운 날 이었다고 하여 서러 웠다고 너무 늦게 내리는 무정한 빗속에서 흐느끼듯 날리는 단풍잎들이 그랬다 Ernesto Cortazar /Dreaming 2023. 11. 30.
감나무 감나무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2023. 11. 27.
너를 위한 노래 너를 위한 노래 신달자 첫사랑은 아니다마는 이 울렁거림 얼마나 귀한지 네가 알까 몰라 말은 속되다 어째서 이리도 주머니마다 먼지 낀 언어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다 버리고 그러고도 남아있는 한가지 분명한 진실 이 때 아닌 별소나기 울렁거림 네가 알까 몰라 2023. 11. 27.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 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있어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2023. 11. 20.